가볍게 흐르고 싶은 구름이 무거워진 몸을 툴툴 털어내던 날, 카페에서 따뜻한 레몬티를 주문했다. 평소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지난 겨울 불현듯 핫초코가 떠오른 것처럼 오늘은 상큼한 따뜻함이 그리웠다. 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이 계절이 여름이 아닌 겨울임에 감사했다. 지금이 여름이었다면 온몸이 젖을 만큼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겠습니다”라는 일기예보에 입술이 삐죽 나오는 것과 달리 “하루 종일 함박눈이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말은 마법처럼 설렘을 가져다준다. 눈송이의 나풀거림에 미소가 지어지고 따뜻한 레몬티에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마지막 겨울을 지나고 있다.
얇게 썬 레몬 조각이 들어간 수제 레몬티에는 진초록의 로즈메리가 얹어져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동그란 컵의 가장자리를 따라 로즈메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시는데 걸리적거리는 방해꾼'이라는 생각도 잠시, 뜨거운 레몬티의 로즈메리는 나의 성급함을 가로막는 작은 신호라는 걸 깨달았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듯 로즈메리는 끊임없이 내 입술을 간지럽혔다. 우물가를 찾은 나그네에게 물을 건낼 때 작은 나뭇잎을 띄우는 것처럼, 마시는 이를 위한 카페 사장님의 작은 배려에 미소가 지어졌다.
커다란 발견도 아닌 것을, 아메리카노를 마실 땐 느낄 수 없던 소소한 즐거움이 반갑기만 했다.
로즈메리가 입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입술을 모아 호호 바람을 불고,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니 코끝으로 느껴지는 연한 로즈메리향과 레몬의 상큼함이 오랫동안 입안에 맴돌았다. 잠깐의 숨고르기 덕분인지 뜨거움 대신 따뜻함이 내 안에 가득 차올랐다.
동네 산책을 하던 어느 날 골목길을 걷다 도로 위에 새겨진 [천천히]라는 세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운전자를 위해 반듯이 새겨진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도로 위의 글자처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쭉 뻗은 도로 사이사이로 작은 골목이 보였다. 얼마 전 개통된 직선도로에 엑셀을 밟고 싶어질 동네 주민에게 도로가 말을 건낸다.
"지금은 천천히 가야합니다"
도로 위에 커다란 글자와 불룩한 방지턱이 조급해지기 쉬운 운전자의 마음에 브레이크를 건다.
천천히 가면 사고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던 주변에 시선을 옮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계절이든 하늘이든 시선이 닿으면 마음이 가는 법이다. 도로 위에 불필요한 사인이 없듯 삶에 크고 작은 방지턱은 나를 위한 안전장치일 확률이 높다.
조급해지기 쉬운 일상에 작은 변주는 숨을 고르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유연함을 선물한다.
이따금 인생의 예상치 못한 일은 일상의 늘임표*가 된다.
주로 내 통제를 벗어난 일들이 일어날 때 빠르게 지나가던 하루가 길어지고 만감이 교차한다.
나만 생각하던 나에게 엄마의 암 진단은 어둡고 긴 터널의 시작을 알렸다. 내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거대한 방지턱에 충돌한 탓에 충격은 오래갔고 하루하루가 더디 흘렀다. 이전과 같지 않은 일상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내 인생이 '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부재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수영하듯 푸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든 엄마를 바라볼 수 있음이 감사했다. 새해 소망에 건강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됐다. 길게 늘어난 테이프처럼 느리게 흐르던 날들은 순간순간 감사하며 함께 웃다보니 어느새 끝이 났고, 우리가족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지원사업에 떨어지거나 나의 제안이 거절될 때면 내 인생에만 수많은 장애물이 놓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여전히 지지부진한 내 모습에 한숨짓고, 내 손을 떠난 일에 오래도록 마음을 쓰며 그 자리를 맴돌다 알게 됐다. 거절은 실패가 아니라 유연히 넘어가야 할 인생의 작은 방지턱이라는 것을, 인생의 방향과 속도를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돈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나의 꿈이라는 것을 되내이며 '빠르게'가 아닌 '느긋하게' 살고자 다짐했던 나의 삶의 속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유연하게 넘어가지 못한 인생의 고비는 '나의 숨을 고르는 자리'로 여기기로 했다. 발견하지 못했던 일상의 즐거움과 소중함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니 순간 느려진 삶에 조급해지지 않기 위해 천천히 나아가려 한다.
더디 오더라도 제 계절이 어느새 도착하듯 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늘임표* : 음악에서 한 음표나 쉼표가 지니는 길이를 알맞게 늘이는 표, 늘이는 길이는 그 악곡의 감정을 생각하여 2배 혹은 3배와 같이 알맞게 정한다. |